
과학은 모르는 것을 하나씩 알아 가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양자역학은 그 생각을 정면으로 흔든다.

이중슬릿 실험은 답이 깔끔하게 나오는 실험이다. 두 개의 틈에 빛을 통과시키면 벽에 밝기가 다른 줄무늬가 생긴다. 물결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가 다시 만날 때 생기는 무늬와 똑같다. 그래서 결론은 하나였다. 빛은 파동이다.
그런데 광자를 한 개씩 쏘아도 같은 줄무늬가 생긴다. 알갱이 하나가 두 틈을 동시에 지나갔다는 뜻이 된다. 여기서 답이 갈라진다. 빛은 파동이기도 하고, 입자이기도 하다.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고를 수가 없다.
같은 일이 에너지에서도 일어난다. 물체는 뜨거워지면 빛을 내뿜는데, 플랑크는 그 에너지가 물처럼 연속으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덩어리로 끊어져 나온다고 보았다.
결정적인 증거는 광전효과였다. 금속판에 빛을 비추면 전자가 튀어나오는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빛을 아무리 세게 비추어도 진동수가 낮으면 전자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반대로 빛이 아주 약해도 진동수만 높으면 전자가 나온다.
빛이 그냥 파동이라면 세게 비출수록 전자가 잘 나와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아인슈타인은 빛을 \(hf\)만큼의 에너지를 가진 알갱이(광자)의 다발로 보았다. 광자 하나가 전자 하나와 일대일로 부딪히는 것이라면, 광자 한 알의 에너지가 전자를 붙잡는 힘보다 작을 때 아무리 많이 던져도 전자는 나오지 않는다.

보어는 전자가 원자핵 주위를 아무 궤도나 도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궤도만 돌 수 있다고 보았다. 수소 원자에서 \(n\)번째 궤도의 에너지는 딱 정해진 값을 갖는다.
계단 같은 것이다. 계단 사이 어중간한 자리에는 설 수 없다. 그래서 전자가 위 계단에서 아래 계단으로 점프할 때 그 차이만큼이 빛으로 나온다. 원자가 특정한 색의 빛만 내는 이유가 이것이다.
여기서 드브로이가 던진 질문이 나를 가장 놀라게 했다. 빛이 알갱이면서 물결이라면, 전자도 물결일 수 있지 않을까? 방향을 거꾸로 뒤집은 질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전자를 고체에 쏘았더니 회절과 간섭이 생겼다. 물결일 때만 나타나는 현상이 알갱이인 줄 알았던 전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식은 전자에만 쓰는 식이 아니다. 야구공에도, 사람에게도 쓸 수 있다. 계산해 보면 야구공의 파장은 \(10^{-34}\,\mathrm{m}\) 정도다. 원자보다도 한참 작아서 있어도 볼 수가 없다. 그러니 야구공이 파동이 아닌 것이 아니라, 파장이 너무 작아 티가 나지 않을 뿐이다.

미시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은 세 가지로 정리된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이 중 첫 번째를 극단까지 밀고 간 이야기다. 상자 안에 고양이와, 50% 확률로 작동하는 장치를 함께 넣는다. 상자를 열기 전까지 고양이는 살아 있는 상태와 그렇지 않은 상태가 겹쳐 있다고 말해야 한다. 이상하게 들리지만, 이상하게 들리라고 만든 이야기다.
그런데 나에게 가장 오래 남은 것은 고양이가 아니라 하이젠베르크였다. 전자를 보려면 빛을 쏘아야 한다. 그런데 광자가 전자에 부딪히는 순간 전자의 속도가 바뀐다. 본다는 행위 자체가 대상을 흔든다. 위치를 더 정확히 재려 할수록 운동은 더 심하게 흐트러진다.
중요한 것은 이 다음이다. 이것은 기계가 정밀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더 좋은 현미경을 만들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자연이 원래 그렇게 되어 있다. 우리가 아직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것이다.
마지막 장에서 슈뢰딩거는 "전자가 물결이라면 그 물결은 도대체 무엇인가"를 묻는다. 그의 방정식을 풀면 파동함수 \(\psi\)(프사이)가 나오고, 그 제곱 \(|\psi|^{2}\)이 그 자리에 전자가 있을 확률을 뜻한다.
그래서 원자 속 전자는 궤도를 도는 작은 공이 아니다. 핵 주위에 안개처럼 퍼진 확률의 구름이다. 우리는 전자가 정확히 어디 있는지 말할 수 없고, 어디서 발견될 확률이 얼마인지만 말할 수 있다.
여덟 장을 정리하고 나서 남은 것은 지식보다는 태도에 가까운 무엇이었다.
배우기 전에는 과학이 모르는 것을 하나씩 지워 가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열심히 재고 계산하면 언젠가는 다 알게 되는 것. 그런데 양자역학은 "여기서부터는 알 수 없다"는 사실 자체를 정확하게 알아낸 학문이다. 모른다는 것을 얼버무리지 않고, 얼마나 모르는지를 식으로 적어 놓았다.
그것이 물러선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아는 척하지 않는 쪽이 더 어렵고 더 정직한 일이라고 느꼈다. 모른다는 것이 답일 때가 있다는 것 — 여덟 장에서 내가 배운 것 중 가장 오래 남을 것 같은 문장이다.